성경에 보면 늙어서 죽음을 앞둔 엘리사가 자기에게 문병차 찾아온 남 유다의 요아스왕을 크게 꾸중하는 장면이 나온다.

화살로 땅을 치라고 해서 세 번 쳤는데 그것을 가지고 엘리사는 크게 나무라며 왕을 호통친다.

도대체 요아스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는 말인가? 땅을 세 번만 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인가? 살인을 했다던가, 아니면 도적질을 했다던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던가 이런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조금 소극적이었고, 조금 더 열정적이지 못했고, 조금 더 간절하지 못했다는 것뿐인데 이것이 과연 그렇게도 큰 죄일까?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여호아하스 왕의 시대에 아람 왕 하사엘이 항상 이스라엘을 학대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인하여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긍휼히 여기시며 권고하사 멸하기를 즐겨 아니하시고 이 때까지 자기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셨더라 아람 왕 하사엘이 죽고 그 아들 벤하닷이 대신하여 왕이 되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열하 13:14-25)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대조, 비교의 방법으로 우리를 교훈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열왕기하 13장에도 그 대표적인 예가 잘 나와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 선지자와 그리고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대조 비교입니다.

요아스왕과 엘리사의 상황의 공통점

엘리사는 이제 늙어서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죽을 병이 들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북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가 병석에 누워 있는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서 문병을 하면서 죽어 가는 엘리사를 보고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정말로 엘리사는 나라의 구원을 위해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아람 민족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할 때면 그의 능력의 영감으로 어느 지역에서 아람 군대가 공격해 올 것인지를 미리 알아 서 그 지역을 방비토록 함으로 국가를 항상 아람의 공격으로부터 지킬 수 있게 해준 준 나라의 은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사 선지자가 이제 늙어서 죽게 되었으니 국방을 총 책임져야 할 요아스왕으로서는 여간 안타까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면서 엘리사의 병듦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슬퍼하고 있는 요아스왕에게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활과 화살들을 가져오십시오.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그런 후에 엘리사는 자기 손으로 왕의 손에 안찰을 해 주었습니다. 능력을 전수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계속 말을 합니다. 『동편 창을 열고 화살을 쏘십시오. 이 화살은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입니다.』 그래서 왕은 쏘았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말합니다. 『왕께서는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곧바로 엘리사는 한가지 시험을 합니다. 『나머지 화살들을 손에 잡으십시오. 그것으로 땅을 치십시오.』

그러자 요아스왕은 세 번을 치고는 그쳤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막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왕이여 적어도 한 오륙번 정도는 쳤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랬더라면 왕은 아람 나라를 진멸하도록 치게 될 것을 왜 세 번만 쳤나이까? 그러므로 왕은 이제 아람 군대에 세 번만 세 번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못 이깁니다.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동이 그렇게 비난받을 정도의 큰 잘못입니까? 땅을 치라고 해서 세 번 쳤는데 그것이 엘리사가 크게 나무랄 정도로 큰 잘못이란 말입니까? 살인을 했다던가, 아니면 도적질을 했다던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던가 하는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조금 소극적이었고, 조금 더 열정적이지 못했고, 조금 더 간절하지 못했다는 것뿐인데 이것이 과연 그렇게도 큰 죄입니까? 그러는 엘리사 자신은 어떠했길래 요아스왕을 이토록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기서 상대적으로 엘리사의 경우는 전에 어떠했는지 그 모습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2장에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능력을 전수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2장 12절입니다.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1. "내 아버지여" 하며 부르는 모습의 공통점

여기에서도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면서 외쳐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13장 본문에 요아스가 병들어 있는 엘리사에게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하는 장면과 똑같습니다.

2. "친다" 라는 단어의 공통점

그뿐 아닙니다. 또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요단강 물을 친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살펴본 열왕기하 13장에 나오는 나오는 『화살로 땅을 친다』라는 단어와 정확히 같습니다.

먼저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도 요단 강을 건널 때 자기의 능력의 겉옷으로 강물을 이리 저리 쳤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요단 강을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3. "능력의 전수" 라는 공통점

두 번째 그의 제자 엘리사는 승천하는 엘리야로부터 떨어진 능력의 겉옷을 주워서 이제 똑같이 요단 강물을 이리 저리 칩니다. 그랬더니 역시 요단 강물이 갈라져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엘리사는 화살을 주면서 손으로 안찰해 주고 그 화살은 구원의 살이니 그것으로 아람을 진멸하도록 치라고 했습니다.

둘 사이의 다른 점

당연히 요아스는 그 화살을 가지고 땅을 치되 세 번만이 아닌 적어도 오륙번 이상은 쳤어야 했었습니다. 마치 그전의 엘리야처럼 그리고 엘리사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능력의 겉옷으로 요단 강물을 이리 저리 치되 세 번만이 아니라 완전히 요단강을 건너갈 때까지 계속 힘있게 이리저리 치면서 건너갔습니다. 세 번만 치고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전에 겉옷으로 요단 강을 건널 때 끝까지 다 건너도록 계속 쳤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왕에게 그렇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너무나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세 번만 쳐 가지고는 아람을 완전히 진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갈 때에도 세 번만 쳐 가지고는 요단강을 완전히 건너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엘리사 자신은 적어도 최소한 오륙번 이상은 쳐서 완전히 건넜는데 요아스는 소극적으로 세 번만 치고는 그만 두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엘리사가 안타깝고 분통이 터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습니다.


그 화살은 분명 여호와의 구원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친히 자기 능력이 왕에게 전수되도록 안찰까지 해 주었었습니다. 이제 요아스왕은 그 화살로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아스왕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적어도 오륙번 이상, 아니 어쩌면 엘리사가 그만 치라고 말릴 때까지 계속 아람 군대를 치는 생각으로 땅을 내리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요아스왕은 세 번만 딱 딱 딱 치고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지적하면서 요아스왕의 큰 실책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아스는 이점에서 엘리사와 비교됩니다. 그는 엘리사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요아스의 소극적 행동을 나무랐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한마디로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에게는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소극적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아스는 열심이 없었습니다. 세 번 정도 해보다가는 그만 두어 버리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요아스를 나무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성경 열왕기하 13장은 바로 이러한 두 사람을 대조해 보여 주면서 현대의 성도들이 요아스의 모습을 본받지 말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에 출전한 운동 선수가 만약에 능력이 부족해서 패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능력은 충분히 있는데도 본인이 열심히 뛰지 않아서 또는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만 지게 된 경우라면 정말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을 것입니다. 능력은 충분히 있는데도 자신의 열심이 부족해서 그리고 간절함이 부족해서 최선을 다해 보지도 못하고 떨어졌다면 그의 행동은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바로 요아스의 경우입니다. 그에게 있는 능력은 엘리사를 통해서 주어진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과연 여호와의 구원의 화살이 그에게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이 사실을 믿고서 간절함으로 열심히 땅을 치는 행동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엘리사가 요아스에게 전수해 주었던 능력의 위대함

여기서 열왕기하 13장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20절입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

엘리사가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 후에 어떤 다른 사람의 시체를 그곳에 던졌더니 그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금방 죽은 사람이 다시 소생하여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갑자기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 죽어 가는 병든 엘리사가 안찰을 해 주었다고 혹 요아스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엘리사에게 있는 능력은 비록 그가 죽어서 뼈로 남아 있어도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하는 힘이 있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능력이 어떠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구절입니다.

이러한 능력이 이제 요아스에게 전수되었으므로 그 능력을 가지고 더욱 최선을 다하는 마음으로, 간절함으로 요아스가 땅을 쳤더라면 하는 너무도 안타까운 모습을 오늘 성경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이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되지! 거짓말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부리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되지!』 라고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선언은 다릅니다. 착하게, 선하게 사는 덕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부분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 내며 견뎌낼것, 담대하게 나갈 것, 열심히 노력할 것, 죽도록 충성할 것 등의 덕목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왜 열심이 없었는가? 왜 간절함이 없었는가? 왜 열망이 없었는가?

사실 정말로 착하고 선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착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홍수가 나서 어떤 지역이 침수되어 수만 명의 주민들이 대피하고 있다고 합시다. 홍수로 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적 피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이 해야 할 가장 큰 착한 일, 선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그들을 구원해 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구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이요, 이것이 바로 인간이 해야 하는 착한 일입니다.

그저 거짓말 않고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최고의 착함과 최고의 선함이 아닙니다. 옆에서 생명이 죽어 가고 있다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최선을 다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구원하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한 일이요, 최고로 착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이 아닙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수마와 같은 사단의 권세 아래서 죽어 가고 있습니까? 지금도 사단의 무서운 세력 앞에 우리 이웃들의 생명이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사단의 흙더미에 깔려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시대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영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소극적인 착함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칭찬 받을 만하고 가장 착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요아스왕은 자기 백성들이 아람 군대에 의해 고난받고 점령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백성을 아람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시키는 구원의 능력, 구원의 화살이 주어졌을 때에 최선을 다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을 가지고 아람을 치는 행동을 보여주었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세 번 치고는 그만 두었으니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것은 큰 죄입니다.

헬기를 보내 주었으면 그것으로 두세명 구원하고는 그만두어야 합니까? 포크 레인을 보내 주었으면 그것으로 두 세번 흙을 파다가 그만 두어야 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오히려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데, 능력까지 주었는데, 열심 내지 않고 간절함으로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차라리 큰 죄악입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신 달란트에 열심과 충성을 다한 사람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맡겨 주신 능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일한 자에게 착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착함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맡겨 준 일에 주신 능력을 가지고 열심히 간절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며 노력하는 것이 바로 주님 보시기에 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심을 내지 않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자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표현을 하셨습니까?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하시며 이 사람을 문밖으로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열심 내서 일하는 것, 혼신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과 악을 결정하는 기준까지도 된다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능력을 주셨는데 그것 가지고 열심과 간절한 마음으로 일하지 않으면, 기도와 전도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구원의 화살까지도 주었는데 그것 가지고 사단 권세를 깨뜨리고 떠내려가는 자들을 힘써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바로 요아스가 이 때문에 큰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요아스는 책망을 받아 마땅했습니다.

예언의 성취

열왕기하 13장 25절을 보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가 하사엘의 아들 벤하닷의 손에서 두어 성읍을 회복하였으니 이 성읍들은 자기 부친 여호아하스가 전쟁 중에 빼앗겼던 것이라 요아스가 벤하닷을 세 번 쳐서 파하고 이스라엘 성읍들을 회복하였더라 』 점령되어 있는 오륙개의 성읍을 아람 왕 벤하닷의 손으로부터 다 구원시킬 수도 있었는데 그만 두어성읍을 회복하는데 그쳤으며 벤하닷을 정말 세번 쳐서 파하는 승리가 왔습니다. 그러나 강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우리의 대장 되시는 예수님은 사단 권세의 홍수에 떠내려가는 이 세상의 뭇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조 대장이십니다. 그분은 얼마나 최선을 다하셨는고 하니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실 정도로 영혼 구원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사단의 권세를 제어할 수 있는 예수 이름의 능력을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엘리사의 능력처럼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입니다. 아람 군대를 진멸시킬수 있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오륙번 이상 치면 완전히 요단강을 건너가게 되고, 아람 군대를 진멸해 잃어버린 성읍들을 다 회복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능력으로 얼마큼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까? 엘리사처럼 요단강을 다 건너기까지 쳤습니까? 아니면 요아스처럼 한 세 번 정도에서 그만 포기한 적은 없었습니까? 주님의 일에 열정이 없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소극적인 것은 분명히 주님 앞에 큰 죄가 된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 조수현목사 -